사회·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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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의사가 돈 알면 못써!" '바보 의사' 장기려

작성일 : 2024.04.22 17:06 수정일 : 2024.04.24 11:37

작성자 : 뉴스대전톡 박붕준 기자

정부가 의대 정원 2천명 증원을 발표하자 전공의와 의대 학생들이 집단 휴학계를 내고, 의사마저 사직서를 내는 등 의료 대란이 일어난 지도 2개월에 이른다.
   
의사들의 파업은 다른 직종과 달리 국민의 생명과 직결돼 있기 때문에 의사단체 카르텔이 국민들의 우려의 눈총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병원을 팽개치고 떠난 의사들의 집단 행동속에서 입원 환자나 애타게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을 보면서 ‘참 의사’이자 한국의 슈바이처 의성(醫聖) 장기려 박사가 떠 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사 임용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새기고 인술을 베풀겠다는 의사들이 서울의 대학병원을 예약하려면 5-6개월을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진료 시간은 고작 몇 분에 불과한데다 지방 병원은 의사가 부족해 지방 대학 의대에 증원을 하겠다고 하는데도 극구 반대한다.

파업 의사들은 부인하지만 ‘지방대학을 나온 의대생들이 나중 서울로 올라와 취업하거나 개업하면 증원된 의사들과의 경쟁으로 수입이 줄어들어 그럴 것‘ 이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돈‘과는 아예 담을 쌓고 가난하고 겸손하게 살면서, 암흑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병든 사람들을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을 몸소 실천, 이 의료대란 상황에 이 시대 심금을 울려주는 ‘바보같은 의사’ 장기려 박사의 고귀한 삶을 <뉴스대전톡>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본다.  

이타적인 삶과 겸손의 대명사로 온 국민에 존경받는 김수환 추기경은 ‘바보’라 불리운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와 그를 ‘하늘의 바보’라고 부른다.

이 ‘바보’라는 말에는 깊은 존경과 사랑이 담겨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이치다.  

또 한 분의 ‘바보’, 바로 아호가 성산인 장기려 박사로, 아프리카 가봉에 ‘슈바이처’가 있었다면 대한민국에는 ‘장기려 박사’가 있다.

‘의사와 바보’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보이지만,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 장기려 박사다. 

장기려는 ‘한국 외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명성 높은 의사로, 수십 년간 의사이자 교수로 일했고 자신이 세운 병원도 있다. 

혹자는 ”돈을 많이 벌었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평생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며 그 자신은 죽는 날까지 집 한 채 없는 청빈한 삶을 살아 ‘바보 의사’라고 불리고 있는 것.

장기려는 현재 고신대병원의 전신인 부산복음병원의 설립자였고 부산대병원 2대 원장을 역임했다. 

더욱 놀란 것은 건강보험이 도입되기 전, 국내 최초로 민간 의료보험조합(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 성공시켜 오늘날 건강보험제도의 기틀을 닦았고, 죽는 날까지 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환자를 돌보면서도 ”나는 아직 가진 게 너무 많다’고 미소를 지은 바보같은 의사가 아닌 ‘바보 의사’다.

- 장기려 박사의 젊은 시절 모습 -

수업료 부담으로 의사의 길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농가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장기려 박사는 올 탄생 113주년, 소천한 지는 올 29년이 됐다.. 

장기려는 미래 공학자를 꿈꾸었지만 집안 형편이 나빠지면서 당시에는 수업료가 비교적 저렴한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의대)에 입학한다.

경성의전을 수석으로 졸업, 외과로 전공을 정하고 대학 부속병원에 남아 백인제 교수의 조수로 들어가는데, 백 교수는 훗날 ‘인제대 백병원’을 설립한 인물이다. 

1940년 일본 나고야대학에서 충수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경성의전을 떠나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과장 부임 이후, 평양도립병원 원장, 김일성대 의과대학 외과과장을 역임한다. 

평양에서는 이미 명성이 자자해 ‘장기려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집도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김일성이 맹장 수술을 위해 장기려를 먼저 찾은 건 맞지만 실제 수술은 당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다고 한다.

- 진료중인 장기려 박사(왼쪽) -

1932년 결혼, 3남 3녀를 둔 장기려는 1950년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하지만, 그 해 10월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이 장기려가 있던 평양을 1950년 10월 19일 점령한다. 

장기려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던 국군 군의관들은 그를 찾아 같이 일을 해달라고 청하자, 국군 부상자를 하루 49명까지 수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중공군이 남하하며 국군은 평양에서 급히 후퇴할 때, 차남 장가용과 단둘만 국군 수송 버스를 타고 급히 피란을 떠났는데, 장기려는 생전 부모님과 다른 가족을 데리고 오지 못한 것을 평생 후회했다고 한다.

장기려 박사의 손주이자 차남 장가용의 아들인 전, 인제대 서울백병원 장여구 교수(현 지샘병원 통합암병원장)는 “할아버지는 ‘중공군이 오면 젊은 사람을 다 죽인다’ ‘국군을 많이 치료했으니 피란을 가는 게 좋겠다’는 주변 말을 듣고 잠시 피란을 갔다 돌아오기로 하셨다”고 회고한다.

- 손자 장여구 교수 -

천막 치고 피란민 진료

1950년 12월 18일 부산에 둥지를 틀은 장기려는 제3육군병원에서 일하다 1951년 6월 20일 영도에 있는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을 세운다. 

이 복음병원이 바로 오늘날 고신대병원으로, 당시에는 겨우 빈 땅에 천막 3개를 친 것에 불과했고, 유엔에서 원조 받은 약으로 피란민을 돌보면서 ‘치료비를 받지 않는다’는 소식에 많게는 하루 200여 명의 환자가 몰렸다.

찾는 환자가 늘면서 당연히 약은 부족했지만 수많은 동료 의사의 무료 봉사와 시민들의 도움으로 제대로 된 의료기관의 모습이 갖춰졌고,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봉직했다.
 

- 생전의 장기려 박사 -

그에게 도움 받은 환자들의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한 환자가 치료 받고도 돈이 없어 눈치를 보자, 장기려는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며 “빨리 집에 돌아가서 푹 쉬고, 돈이 없어도 괜찮으니 며칠 뒤 꼭 다시 찾아오라!”고 했고,  영양실조 환자가 ‘돈이 없어 먹을 걸 구할 수가 없다’고 하니 처방전에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시오’라고 쓰기도 했다.

손자 장여구 전 인제대 교수(현, 지샘병원 통합암병원장)는 “할아버지가 명동성당 앞을 지날 때 한 걸인이 ‘돈을 달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통째로 준 적이 있다고 한다. 

걸인이 수표를 바꾸려고 은행에 갔는데 ‘이건 틀림없이 훔친 것이다’ 라는 은행측이 장 박사에 확인요청이 오자, 뒤늦게 할아버지가 ‘내가 준게 맞다’고 한 적도 있다”고 말한다. 

장 교수는 “할아버지는 정말 세상 물정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환자만 생각한 ‘바보 의사’가 맞은 것 같다고 말한다.
 

- 환자 진료중인 장기려 박사 -

국내 최초 의료보험으로 환자 혜택

1968년 동료 의사들과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는데 당시에는 의료보험 제도 도입이나 보험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하지만 장기려는 ‘누구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당시 담뱃값 100원에도 못 미치는 월 60원의 보험료만 받고 민영 의료보험을 운영한다.

손자 장여구 교수는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료보험 제도 자체를 잘 모르니까 ‘할아버지가 쩨쩨한 돈으로 사기를 친다’ ‘오래 못 갈 것이다’라는 말도 많았다고 한다. 

의료보험조합의 성공은 영세민에게 의료 혜택을 주는 걸 넘어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필요성을 각인시킨 것으로, 의료보험연합회의 ‘의료보험의 발자취(1997)’에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임의가입 의료보험조합 중 유일하게 성공한 사례이며 1977년 의무 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 공백기를 메웠다’고 극찬한다.

 
뛰어난 의사, 청빈한 삶

장기려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냈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 절제술에 성공해 국내 외과학, 그중에서도 간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독보적이다.

전쟁 중 남하로 부산에 거주하면서 고신대병원의 전신인 부산복음병원의 설립자이자 초대 원장인 동시에 1958년부터 2년 간 부산대병원장을 지냈고, 부산복음병원 퇴직후에는 청십자병원을 설립해 원장직을 맡았다.

이런 공적으로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9년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 등 무수히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부유한 삶과는 거리가 멀어,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집 한 채 소유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다. 

늦은 나이에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20여 평에 불과한 고신대병원 옥탑방에서 지내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그런데도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해 더욱 숙연하게 한다. 

장기려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956년 장기려 교수와 함께 부산대의대 ‘외과 의국’ 창립에 기여했던 장 교수의 '애제자' 故 우동영 박사(훗날 경남 사천 우동영 외과의원 운영)는 <부산대 외과학교실 50년사> 기고를 통해 “당시, 침실 하나에 구내식당 밥을 먹여 준다는 조건으로 외과 야간당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 장기려 교수 애제자 故 우동영 박사 -

우 박사는 이어, 장교수님께서 우리 외과의국 구성원들에게 “의사가 돈을 알면 못 써!”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생생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우동영 박사는 또 기고를 통해, "선생님께서 나를 두 번이나 불러, 앞으로 외과도 '일반외과'와 '흉부외과', '정형외과'로 분리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니 우 군은 미국가서 흉부외과를 한 5년 정도 배우고 와라! 미국은 흉부외과 의사가 부족해 숙식도 해결된다고 말씀하셨다"는 기억이 생생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1969년 삼천포에서의 개업 당시 박사학위 취득한 우동영 박사 -

그러나 우 박사가 스승님께 "갈 여비가 없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김해 진영에 성모병원이 개원해 외과 의사를 요청하니 가서 1년 근무하면 미국 여비를 저축할 수 있을 것이다" 라면서 "어려운 수술은 백태윤 교수께서 도와 주실 것이다" 라고 전폭적 지원을 해주셨다"고 한다.

그러나 우 박사는 "70 고희를 넘겨 생각하니 마음 속 죄송한 것은 당시 가정 형편이 기울어, 끝내 도미하지 못하고 낙방거사가 된 것이 지금 와서 후회스럽다"고 기록되어 있다.

- 초등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바보 장기려' -

이처럼, '바보 장기려'의 깊은 마음에서 샘솟는 '서번트 리더십'의 삶은, 우동영 박사의 지역사회 선행으로 이어지고 다음 세대로 계속 전파되면서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온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안겨주고 있다.

평생에 걸쳐 봉사와 나눔을 실천한 성산 장기려 박사!

국내 외과학을 개척한 의료인이자 국민건강보험의 기틀을 닦은 의료행정가였지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배려하는 ‘바보 장기려 정신’이 아닐까? 

의사 파업이 두 달을 맞고 있는 요즘,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의 혼이 담긴 부산시 초량동 ‘장기려기념관’을 요즘 더 부쩍 많이 찾고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의사 자격을 부여하는 권한을 정부가 지니고 있는데도 의사 증원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의사단체가 갑이고 정부는 을로 전락했다.

지난 총선 전, 의사단체의 장이라는 사람은 국회의원 30명 정도는 우리가(의사단체) 당선시킬 수 있고 의사들을 이기는 정부는 없다"고 공언했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선진국 의사단체들도 정부를 이긴다고 기고만장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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